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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년 전 오늘,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서 왜구 무리를 순식간에 사살했다

1592년 4월(음력), 수백 척의 군함을 이끈 일본군이 조선 부산의 앞바다에 나타났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인사이트] 디지털뉴스팀 = 1592년 4월(음력), 수백 척의 군함을 이끈 일본군이 조선 부산의 앞바다에 나타났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개전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현 양평)을 거쳐 한양까지 점령했다.


조선의 왕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갔고 전란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만큼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그들의 진군을 막았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개전 이후 이순신을 만나 이미 100여 척이 넘는 군함을 잃은 일본은 수군 부대를 이끌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일본 최고의 수군 장수였던 구키 요시타가 등을 소집해 조선 수군 토벌을 진행한다. 


이순신은 그들의 공세를 피하지 않았다. 이들을 그대로 놔두면 조선의 바다와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위험했다. 


바닷길로 보급로마저 열어주게 돼 일본의 진군은 더욱 빨라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을 모아 총 55척을 이끌고 진군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전투를 앞둔 일본은 승리를 자신했다. 이미 와키자카는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을 무참히 짓밟은 경험이 있었다. 


그는 넘치는 자신감을 가진 채 군함 70여 척을 이끌고 거제도 앞바다로 나아갔다. 


조선 해군은 첩보를 통해 일본의 동향을 꼼꼼히 확인했다. 와키자카의 진군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 앞바다의 일본 수군을 보고 작전을 세웠다. 주변이 협소한 곳의 일본 군함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이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5, 6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가 미끼조로 투입돼 일본 수군 전체를 유인하는 것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자신감에 넘쳤던 와키자카는 쉽게 미끼를 물었다. 퇴각하는 조선 수군을 본 일본군은 그대로 뒤를 쫓아 한산도 앞바다까지 나아갔다. 


그곳에는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한 조선 수군이 있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군함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일본은 대부분의 수군을 잃었다. 전선 47척이 침몰하고 12척을 빼앗겼다. 조선 수군의 대승이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1592년 음력 7월 8일에 일어난 이 전투는 '한산도 대첩'으로 불리며 임진왜란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


혹자는 말한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은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진출 야망에 '사형'을 선고한 전투라고. 


나라가 위기에 놓인 순간, 열세의 상황에서도 냉정함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이순신은 당시 백성들은 물론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자신감을 주고 있다. 


우리가 이순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