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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3일)은 윤세주 열사가 40만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날입니다

일본군 40만 명을 상대로 3천 명의 독립의용군 대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윤세주 열사는 적의 총탄을 맞고 1942년 오늘 숨을 거뒀다.

인사이트YouTube 'KBS 한국방송'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약산 김원봉과 밀양의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윤세주 열사다. 


그는 학교에서 일장기를 나눠주면 화장실에 버리는 등 민족의식이 강했던 인물이다. 


오늘(3일)은 윤세주 열사의 순국일이다. 


78년 전 오늘,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으로 불리는 태항산 일대에서 일본군 20개 사단 40만 명의 군대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인사이트


인사이트YouTube 'KBS 한국방송'


중국 태항산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때문에 군대가 진입하기 어려웠고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八路軍)과 조선의용군가 이곳을 근거지로 싸웠다. 


일본군은 이곳에 주둔한 팔로군(八路軍)과 조선의용군 병력을 몰살하기 위해 40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일본군은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해 막강한 화력을 펼쳤지만, 이와 대적해 싸우는 조선의용군의 규모는 불과 3천~4천 명 수준이었다. 


조선의용군이 택한 방법은 하나였다.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퇴로를 열어 빠져나가는 것. 조선의용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인사이트


인사이트


인사이트YouTube 'KBS 한국방송'


조선의용군은 부대를 양쪽으로 나눠 일본군의 총탄을 막아냈고 그사이 팔로군의 주력부대가 퇴로를 확보해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때 윤세주 열사는 적이 쏜 총알에 맞고 쓰러졌다. 


간신히 목숨을 구해 근처 동굴로 대피했으나 동료들이 그를 찾은 건 3일 후였다. 그렇게 윤세주 열사는 41세의 나이에 머나먼 중국의 한 동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윤세주 열사가 동지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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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YouTube 'KBS 한국방송'


윤세주 열사를 비롯한 당시 조선의용군의 치열한 싸움은 중국 역사 그 자체가 됐다. 조선의용군이 퇴로를 열어 팽덕회, 등소평과 같은 인물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팽덕회는 6·25전쟁 당시 백만 중공군의 총사령관이 됐고, 등소평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윤세주 열사가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 또한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윤세주는 중국에서 일본에 대항했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3·1운동에 참석해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의열단 활동을 했던 그의 업적은 여기에 가려져 1982년에 이르러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