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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년 전 오늘(16일),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 의사가 태어났습니다

이완용 암살을 시도했던 이재명 의사는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평양군 평양성 내에서 태어났다.

인사이트(좌) 이재명 의사 / 국가보훈처, (우) 이완용 / 독립기념관


[인사이트] 김천 기자 = 131년 전 오늘(16일)은 매국노 이완용의 암살을 시도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태어난 날이다.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평양군 평양성 내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평양 일신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하와이로 넘어갔다.


그러던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항일 운동 물결은 거세졌다.


당시 미국 본토에 있었던 이 선생은 안창호 의사를 중심으로 창립된 '공립협회'에 가입해 항일 민족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을사5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비롯한 매국노 처단을 추진했다.


인사이트이재명 의사가 이완용 암살을 시도했던 종현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의 모습 / 안중근 의사 기념관


그러던 1909년 12월 22일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이완용이 서울 종현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역적 처단을 다짐한 이 선생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해 이완용을 기다렸다. 


많은 인파 속 인력거 하나가 선생의 눈에 들어왔다. 이리의 눈을 한 이가 타고 있었다. 이완용이 분명했다.


선생은 품에 가지고 있던 비수를 꺼내 들고 재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선 이완용의 허리에 비수를 꽂았다.


기습적인 공격에 이완용은 혼비백산했다. 선생은 이완용이 도망치려 하자 쫓아가 어깨 등 3곳을 더 찔렀다. 


외세가 나라를 삼키는 데 일조한 이완용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tvN '미스터 션샤인'


이 선생은 거사를 치른 후 "오늘 우리의 공적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고 말하며 만세를 외쳐다.


그리고선 곁에 있는 이에게 담배를 청해 담배를 태우다 곧 일본 순사에게 붙잡혔다.


이 선생은 이후 재판을 받게 됐다. 혐의는 살인미수. 이완용은 위독할 정도의 상태까지 이르렀지만 즉시 병원으로 후송돼 목숨을 부지했다.


법정에서 재판장은 선생을 향해 물었다.


"피고와 같이 흉행(흉폭한 일)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박열'


재판장의 질문에 선생은 눈을 부릅뜨고 답했다.


"나는 흉행이 아니라 당당한 의행을 행한 것이다. 의행에 찬성한 이는 2천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선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태연하고 엄숙한 어조로 이완용의 죄목 8가지를 통렬히 꾸짖었다.


재판부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형이 확정된 선생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최후 진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


그리고 4달여 뒤인 1910년 9월 30일, 선생은 사형장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호기로웠던 조선 청년의 마지막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