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부자로 태어나 '수백억 전재산' 독립운동에 썼다가 쓸쓸히 '굶어 죽은' 6형제

600억을 호가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쓰고 정작 본인들은 굶어 죽은 여섯 형제의 사연을 전한다.

입력 2019-04-17 11:52:18
이시영 선생 / 국가보훈처 블로그 '훈터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66년 전 오늘인 1953년 4월 17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쓸쓸히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노인은 먼저 떠나간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중에서도 친구처럼, 때로는 부모처럼 의지했던 형들을 떠올렸다. 고문사, 병사, 객사도 모자라 굶어 죽기까지 했던 형들...


독립운동가 성재 이시영 선생은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구한말 당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부호이자 명문가였다. 당시 서울 명동을 지나려면 이들 형제 가문 소유의 땅을 밟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진 / 국가보훈처


이런 선생의 집안은 끊임없이 일제의 친일 회유를 받았다.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선생은 일제와 뜻을 같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유혹은 끈질겼고, 고민하던 이들 6형제는 전 재산을 원래 가치의 절반가량으로 후려쳐 급히 처분하기에 이른다.


제값을 받지 못했음에도 형제들이 판 집안의 전 재산은 당시 소 값으로 1만 3,000마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소 시세가 한 마리에 500만원이라 치면, 약 650억(실은 650억의 두 배)의 재산을 보유했다는 소리다. 


650억을 들고 여섯 형제는 서울을 떠나 만주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 


이회영 선생 / 사진 제공 = 서울시


독립군 양성 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들은 이후 상해로 다시 거처를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다.


학교 운영,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을 토지 매입, 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먹여 살릴 식비 등에 전 재산을 쓴 형제들은 이때 파산에 이르며 엄청난 생활고를 겪는다. 


독립운동이 발각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형제 중 넷째 이회영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고문사했다. 


다른 형제들 또한 일제의 감시 속에 병사, 객사, 또는 굶어 죽는 아사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실종된 형제도 있었다.


광복 후, 오른쪽 눈물을 훔치는 노인이 이시영 선생 / 뉴스1


1945년 조국이 해방하고 돌아와 다시 우리 땅을 밟은 이는 결국 막내,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물론 선생도 죽는 날까지 가난에 시달리다 눈을 감았다.


부와 권력을 쥐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6형제. 형제들의 자녀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그 대가로 고되고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여섯 형제의 후손들 또한 오늘날 대부분이 여전히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