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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중근 의사를 도왔던 최재형 선생이 일제에 사형당한 날입니다"

"러시아의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인사이트위키디피아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러시아의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러시아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 항일 운동을 할 당시 했던 말이다.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최재형 선생은 9세 때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 지신허(地新墟)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페테부르크 등 러시아 전역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20대 이후 사업가와 행정가로서 뛰어난 능력의 발휘해 당시 러시아에 거주하던 한인들의 대부(代父)가 됐다.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최재형 선생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을사늑약(1905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되자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범윤, 안중근, 이위종과 함께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한 최재형 선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모의했다.


당시 최재형 선생은 안 의사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 의사가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계획했다. 또한 안 의사를 변호할 변호인도 미리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지만 안 의사가 거사 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1910년)되자, 최재형 선생은 안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죄책감에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했다.


인사이트온라인 커뮤니티


소중한 동료를 잃었지만 최재형 선생의 항일 운동은 계속됐다.


최재형 선생은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범윤과 함께 설립한 대한국민회의 명예 회장으로 일했고,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러시아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과 부국강병의 조국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키워가던 최재형 선생은 안타깝게도 1920년 4월4일 일제가 일으킨 '4월 참변'으로 희생됐다. 당시 나이 63세였다.


1920년 4월 7일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총살로 순국한 최재형 선생의 묘지는 당시 일제가 총살 현장을 매워버린 탓에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로 건너온 한인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전 재산을 다 털어 독립 운동에 나섰던 최재형 선생.


독립운동가로서 봉사와 나눔, 희생을 몸소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최재형 선생의 97주기 추모식은 오늘(7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렸다.


최재형 선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며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