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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자금' 지원하면서도 고성장해 '120주년' 맞은 동화약품

숱한 친일 기업 속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며 성장한 '동화약품'이 120주년을 맞았다.

인사이트좌측은 까스활명수, 우측은 창업자 민강 사장 / 사진 제공 = 동화약품


1919년 3·1 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의 필요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 사이 연락을 담당하는 비밀단체가 태동하는데,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 연통부'(聯通府)다.


'부채표 까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 본사(서울시 중구 서소문로9길 14)가 서울 연통부가 있던 곳이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 창업자 민강 사장이 임시정부와의 연락책을 맡으면서 자신의 약방을 서울 연통부 사무실로 사용했다.


민강 사장은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의 아들이다. 당시 궁중에서 쓰이는 생약 비방을 서양의학과 접목해 탄생한 활명수는 우리나라 제약사의 기원이기도 하다.


진작부터 독립운동을 해온 민강 사장은 서울 연통부 총책임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활명수를 팔아 얻은 수익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댔다.


인사이트동화약품


당시만 해도 급체,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아 활명수가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 대접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는데,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일제의 감시로 돈을 전달하기 어려울 때는 활명수를 직접 중국으로 보내 팔아서 쓰도록 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1일 "192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이었다"며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가 현지에서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민강 사장은 임시정부에 발송할 비밀문서를 목판에 새기다 발각되는 등의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 때문에 건강이 악화돼 1931년 4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민강 사장에게는 지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민강 사장의 사망 이후에도 그의 정신은 후대 동화약방 경영자들에게 이어졌다.


인사이트좌측은 윤광열 명예회장, 우측은 윤창식 사장 / 사진 제공 = 동화약품


5대 사장으로 동화약방을 인수한 보당 윤창식 선생은 민족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산직장려계', 빈민 구제 활동을 하는 '보린회', 민족 운동을 표방한 단체 '신간회' 등을 지원했다.


7대 사장인 윤광열 명예회장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재학시절, 일본에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한 전력이 있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정부군을 찾아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맡기도 했다.


현재 서울 연통부의 흔적은 동화약품 본사 앞 '연통부 기념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념비에는 서울 연통부의 활약상과 기념비 설립 의의 등이 적혀있다.


활명수는 1960년대 탄산을 추가한 '까스활명수'로 리뉴얼돼 올해 출시 120주년을 맞았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약이다. 활명수는 한국기네스북에 국내 최초의 등록상품으로도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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