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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이끈 유관순 열사가 일제로부터 당한 '끔찍한 고문'

일제의 끔찍한 고문에도 유관순 열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칠 굳은 각오를 꺾지 않은 채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장영훈 기자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결의에 찬 목소리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했다.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의 자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망어린 외침은 태극기 물결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져나갔다.

 

그해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던 유관순 열사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 헌병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끔찍한 고문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칠 굳은 각오를 꺾지 않은 채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일제는 유관순 열사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고자 펜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는 것도 모자라 잔혹한 성(性) 고문까지 추악한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다음 해인 1920년 9월 28일. 출옥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유관순 열사는 꽃다운 18세 나이에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서 그토록 열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유관순 열사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며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고 유언을 남겼다.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유관순 열사의 머릿속에는 온통 일제로부터 빼앗긴 조국의 독립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순국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된 유관순 열사는 일제가 군용기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졌고, 지난 2015년9월에 세워진 추모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