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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3·1'운동 알리며 일본 만행 폭로한 석호필 박사

한국의 독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스코필드 박사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사이트EBS '역사채널e'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여기 불쌍한 민족을, 그들이 겪어왔고 당하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의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1889∼1970)는 조선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전 세계 알린 '푸른 눈의 한국인'이었다.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 주 럭비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16년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친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인사이트유관순 열사 / 연합뉴스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한민족의 모습에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제가 학살을 자행했던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의 참상, 만세를 부르짖는 한민족의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 곳곳에 폭로했다. 


또한 외국인 신분과 일본 경무국장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형무소에 갇혀있는 독립운동가들을 구출하거나,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비인도적인 만행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서대문 형무소 8호실 감방에 갇혀 있을 때 스코필드 박사가 우리를 방문해 미국제 고약을 넣어주며 나와 나의 친구들을 위로하고 떠났다"_유관순 열사


인사이트Youtube '한국인이 알아야 할 역사 이야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결국 일제의 감시와 살해 위협으로 인해 1920년 4월 한국을 떠났다.


1958년 8월 국빈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온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스코필드 박사는 계속해서 한국에 머물며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970년 4월 12일 81세 나이로 서거한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인사이트EBS '역사채널e'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必).


'돌 같은 굳은 의지로,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의 강인함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뜻의 이 이름은 우리 가슴에 '34번째 민족지도자'로 새겨졌다.


그 누구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스코필드 박사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