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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1일)은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의 순국일입니다"

81년 전 오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57세의 생을 마감했다.

인사이트단재 신채호 선생 / 연합뉴스


[인사이트] 문지영 기자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81년 전 오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57세의 나이에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생을 마감했다.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에서 태어난 단재 신채호 선생은 10세에 시를 짓고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신동'이었다.


1905년 단재는 성균관 박사가 됐지만 바로 그해 '을사늑약'이 일어나고 민영환이 자결하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이에 단재는 관직에의 뜻을 포기하고 1905년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해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인사이트연합뉴스


또한 단재는 국내외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역사학자로서 단재는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 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1907년 단재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에 힘을 썼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빼앗긴 뒤 단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그곳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간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다.


인사이트뤼순 감옥 단재 신채호 선생 수감 독방 / 연합뉴스


그러다 1925년경부터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단재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활동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결국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 대만으로 가다가 일제에 체포된 한 죄로 체포된 신채호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 동안 옥살이를 이어가던 신채호 선생은 그동안의 망명 생활로 점차 건강이 악화됐다고 알려졌다.


결국 1936년 2월 21일 신채호 선생은 중국 랴오닝 반도의 끝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차가운 바닥에서 옥사했다.


"화기라고는 조금도 없고 시멘트 바닥에 다다미 몇 장, 홑이불 정도 밖에 안 되는 얄팍한 이부자리 속에 아버지가 누워계셨다"고 신채호 선생의 아들 신수범 씨는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