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완용은 92년 전 오늘 죽는날까지 편안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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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92년 전 오늘(12일)은 친일파 이완용이 편안하게 눈을 감은 날이다.


1858년(철종 9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10세 때 세도가인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간다.


어려서부터 출세욕이 강하다는 평가를 들은 이완용은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 말기 문신으로 있던 1905년, 일본으로부터 조약체결 제의를 받는다.


이를 승낙한 이완용은 일본군 무력시위를 이용해 고종을 협박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담은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선다.


1907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고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고 인사, 입법, 행정 등 왕의 내정권을 박탈한다.


당시 현장을 기록한 구한말 학자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고종을 향해 칼을 빼 들고 고함을 질렀다. 고종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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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접한 수만 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규탄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개의치 않고 이후에도 단독으로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이완용은 마침내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나라를 판 장본인이 된다. 


반대로 1919년 3.1운동 등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비판하고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렇듯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로 이완용은 후작의 지위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또한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은 덤에 가까웠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했던 땅은 현재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의 7.7배에 달하는 2천234만㎡로 밝혀졌다.


후에 이완용은 그의 전기 '일당기사'에서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회고했다. 철저하게 개인의 영달을 챙긴 이완용이었다.


인사이트실제 이완용이 죽기 전까지 머물던 저택 / 온라인 커뮤니티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그의 나이 67세로 숨을 거둔다. 사인은 노환으로 인한 폐렴이었다. 


그의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다. 


일본군의 호위 아래 진행된 장례는 1,3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이완용의 3천 평짜리 집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권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완용의 직계 증손자 이윤형은 지난 1997년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조상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이윤형은 당시 시가로 30여억 원에 달하던 토지를 받은 다음 곧바로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다른 후손들도 일본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단죄를 제대로 받지 않은 이완용. 


지난해 8월 기준,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환수하기로 한 이완용의 땅은 실제 그가 소유했던 토지의 0.05%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 팔아넘긴 '친일파' 이완용 재산 최초 확인…"여의도의 7.7배"조선의 국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는데 앞장섰던 '매국노' 이완용의 전체 재산 규모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나라 팔아 부 축적한 '친일 매국노' 이완용 땅, 후손들에게 '대물림''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전체 재산 규모가 처음으로 확인된 가운데 땅 일부가 후손들에게 대물림된 사실이 확인됐다.


황효정 기자 hyojung@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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