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징집돼 억울하게 '전쟁 범죄자' 된 한국인 할아버지 사연
재일 한국인 이학래 할아버지가 억울하게 BC급 '전범'에 오른 사연이 공개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인사이트] 이별님 기자 = 일제강점기 당시 징집돼 억울하게 BC급 '전범'이 된 한국인 이학래 할아버지의 사연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지난 15일 (현지 시간) 일본 매체 아사히 신문은 일본 대학생들이 일제 때 끌려갔다가 억울하게 전범의 멍에를 지게 된 재일 한국인 할아버지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다큐멘터리 제목은 '전후 보상에 숨겨진 부조리-한국인 전(前) BC급 전범의 싸움'이다.
'BC급 전범'이란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 국제군사재판 조례의 전쟁 범죄 유형 B항 '보통의 전쟁범죄'와 C항 '반인륜 범죄'에 해당하는 범죄자를 뜻한다.
일본 대학생들이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다룬 인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BC급 전범이 된 재일 한국인 이학래(92) 할아버지다.
신문 기사를 통해 이 할아버지의 삶을 접한 학생들은 지난해 9월 자료를 조사하고 그를 인터뷰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조선인 이 할아버지는 1942년 3천 명의 포로 감시원을 2년 계약직으로 뽑는다는 일제의 광고를 접했다.
이 할아버지는 관할 면사무소의 강한 권유에 따라 지원하게 됐고, 17세의 나이로 일제에 징집돼 포로 감시원으로 태국에 보내졌다.
당시 관공서의 권유를 거절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 징용이었다"는 게 이 할아버지의 주장이다.
2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이 할아버지는 태국과 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복무했다.
이곳에서 이 할아버지는 포로 감시와 작업 인원 모집 등의 업무를 맡았다.
이 할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규칙을 위반한 포로들의 뺨을 때리는 등 포로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한다"며 "당시 일본군은 포로를 인간 취급한 적 없다"고 회고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이 할아버지는 1947년 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전범 재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당시 이 할아버지는 자기 변론도 허용되지 않은 전범 재판을 받으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이 할아버지는 수감 중 20년으로 극적으로 감형됐고, 수년 뒤 감옥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동료들 중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도 적지 않았다.
석방된 후 이 할아버지는 식민지 백성인 자신이 왜 전범이 됐는지를 공부해 나갔다.
그 결과 자신 역시 일제 식민지 피해자라는 점을 깨달은 이 할아버지는 1955년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국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동진회'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조선인 전범 출신 모임이다. 이 할아버지는 현재까지도 동진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 할아버지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쟁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보상 목록에서 그를 제외했다.
동진회의 지속적인 투쟁에도 일본 정부는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보상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할아버지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현재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일본 대신 전범이 돼 책임을 떠안고 죽어간 동료들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겠다는 것이 이 할아버지의 입장이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일본인 대학생은 "솔직히 일본인이 언제까지 계속 사죄해야 하느냐는 마음이 있었지만,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한편 이 할아버지는 2006년 한국 정부로부터 '강제 동원에 의한 전쟁 피해자'로 뒤늦게나마 인정받았다.
이별님 기자 byul@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