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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을까"…'위안부' 할머니의 눈물

2017.08.15 19:43

인사이트YouTube 'newstapa'


"군인들한테 갈보짓 한 더러운 년"


죽은 남편은 술에 취하면 사람 가슴에 칼을 꽂는 소리를 했다. 아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땐 내 더러운 팔자가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내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안소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열일곱 때 일이었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했다. 그 후 나는 평양에 있는 기생집 수양딸로 보내졌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양딸과 함께 권번에 다녔다. *권번 :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의 조합을 이르던 말로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한 곳


나이가 어려 권번을 졸업하고도 평양에서 영업할 수 없었던 우리는 양아버지와 북경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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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스파이지? 이쪽으로 와"


북경에 도착했을 때 일본 장교가 양아버지를 데려갔다. 언니와 나는 따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양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트럭을 타고 하룻밤을 꼬박 달려가 어떤 집에 도착했다. 조금 있으니 낮에 양아버지를 데려갔던 장교가 들어와 나를 옆방으로 끌고 갔다. 장교가 옷을 벗기려 해 반항하다가 옷이 다 찢어졌다. 그날 밤 나는 그에게 두 번이나 강간당했다.


그 집에는 조선인 여자가 3명이 더 있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돈을 내는지 전혀 몰랐는데 그중 한 명이 “사병은 1원 50전, 장교들이 긴 밤 자는 데는 8원을 우리에게 내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를 그만둘 때까지 한 번도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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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리 때도 군인을 받아야 했다. 월경할 때는 군의관에게 받아두었던 솜을 말아서 피가 새 나오지 않게 깊이 넣고 군인을 받았다. 나중에 솜이 나오지 않아 고생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마흔 살은 돼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그는 군인들이 토벌 나가고 없는 틈을 타 몰래 들어온 거였다.


"나갈 때 날 좀 데리고 나가줘요"


그에게 사정했지만, 그는 나를 강간한 뒤 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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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면 소리 지르겠다고 협박해 그와 함께 위안소를 빠져나왔다. 일본군에 끌려간 지 넉 달만이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 어떻게 부대 있는 골목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를 따라 중국을 떠돌며 열아홉 살에 첫 딸을 낳았고 2년 뒤에는 아들을 낳았다.


해방 후 우리 가족은 비로소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 난리 통에 딸과 남편, 아들을 모두 차례로 잃었다. 부모 복 없던 년은 어찌 이리 남편 복도, 자식 복도 없는가 싶었다.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살지 못했을까.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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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떻게 한들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을까…


26년 전 오늘, 故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거주자 중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는 동기가 됐을 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일본의 만행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국내외에서 활발한 강연활동을 벌이다가 1997년 12월 눈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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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매춘부'로 비하한 박유하, "위안부가 아이돌처럼 되고 있다"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위안부가 아이돌처럼 되고 있다"고 발언해 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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