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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장기 말소 사건' 주도한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암살된 날이다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여운형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우익 청년에게 암살됐다.

인사이트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인사이트] 김소영 기자 =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


1886년 5월 25일생인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에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다.


8·15 광복 후 독립 국가 건설과 좌우 합작 운동에 힘썼던 그는 대한 제국 시기 신민회 활동과 애국 계몽 운동 등 다양한 민족 운동을 벌였다.


그는 1907년 대한 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화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인사이트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그전까지 여운형 선생은 구한 말 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시작한 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며 파리 강화 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을 만큼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실제 명망이 두텁던 여운형 선생은 3·1 운동 이후 우리나라의 자치 문제를 의논하자는 일본의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제안을 비판하면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할 만큼 독립에 대한 염원이 강했고 항상 일제에 당당한 면모를 보였다.


인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운형 선생은 소련과 중국을 오가며 항일 운동을 벌이다가 경찰에 잡혀 3년간 옥살이를 한 뒤 국내에서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냈다.


그때 그는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팍에 있던 '일장기'를 지운 뒤 보도한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했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됐지만 여운형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건국 동맹'을 만들어 끊임없이 일본의 패망과 광복에 대비했다.


그는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우파 합작 운동에 앞장섰다.


인사이트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화합을 위해 평양에 방문에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것도 여운형 선생이다.


하지만 그는 우익 청년 한지근에게 1947년 7월 19일 암살되고 만다.


그가 세상을 뜬 뒤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 


첨예한 이념 다툼 아래 한국에서 '좌익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기 때문.


인사이트몽양기념관


이념의 희생양이던 여운형 선생은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독립운동 서훈 2급)에 머물렀다가 2008년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으로 승급되며 명예를 회복했다.


여운형 선생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신문사의 존폐가 달린 위기에서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는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또한 살아생전에는 남한과 북한의 합치를 꿈꾸어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정치인이었다.


인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저는 친일파 후손입니다"···독립운동 영화 만들고 싶던 청년의 눈물자신이 친일파 후손임을 알게 된 한 누리꾼의 절망 섞인 고민이 눈길을 끈다.


김소영 기자 soyo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