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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故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사건 30주기입니다"

황규정 기자 2017.06.09 11:26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뿌연 연기가 가득차 앞도 보이지 않는 연세대 정문.


1987년 6월 9일 오후 4시 40분, 故 이한열 열사는 이곳에서 전경이 던진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30년 전 오늘(9일)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은 날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인 '6월 항쟁'의 서막이 열린 날이다.


인사이트(좌) 연합뉴스, (우) 이한열 기념사업회 


1966년 8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시골 소년 이한열은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목도한다.


부조리에 맞서는 시민들을 보며 학생 운동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한 때가 중학교 2학년,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이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대학생 이한열은 줄곧 동기들과 함께 전국 국토 순례를 하며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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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1987년 6월 9일 각 대학에서 출정식이 열렸고, 이한열 역시 학생 2천여명과 함께 연세대 정문으로 나섰다.


이들은 '4천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전경들은 무자비했다. 학생들을 삼면으로 에워싸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전경이 수평으로 쏜 최루탄은 22살 청년 이한열의 머리로 날아들었고, 그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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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이를 계기로 '살인적 최루탄 난사'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민들은 어린 학생에게 일어난 비극에 분노했고, 약 100만명의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군부 독재를 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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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민주화'를 외쳤던 6월 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결국 성난 민심 앞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 


일각에서는 '6월 항쟁'이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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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가슴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지핀 이한열은 1987년 7월 5일 끝내 숨을 거뒀다.


30년이 지났지만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여전히 텅 빈 거리에 홀로 쓰러진 아들의 모습을 보면 눈물부터 흐른다. 


배 여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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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9일) 오후 3시 연세대학교 한열동산 내 추모비에서는 故 이한열 열사 피격 30주기를 맞아 추모제가 거행된다.


이한열 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현역 학생들이 참여하는 '추모행렬 재연'을 시작으로 추모사, 유족 대표 어머니의 인사 말씀, 헌화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제에는 배은심 여사를 비롯해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대표자와 재야인사 및 현직 정치인들이 다수 참석할 예정이다.


"오늘은 22살 청년 '이한열'이 최루탄 맞아 숨진 날입니다"지난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 학생은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중 전경이 던진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황규정 기자 kyoojeong@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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