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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정치 사이에 선 쇼스타코비치의 불안

한 남자가 작은 여행 가방을 싸들고 층계참에 서 있다. 가족들이 잠든 자신의 집에서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인사이트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제공]


한 남자가 작은 여행 가방을 싸들고 층계참에 서 있다. 가족들이 잠든 자신의 집에서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불면과 불안·공포에 휩싸인 이 서른 살의 남자는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다.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71)의 장편소설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은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일대기다. 쇼스타코비치는 열아홉 살에 쓴 첫 교향곡으로 명성을 얻으며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스탈린 독재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1936년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당시 소련 문화예술계에서 일어난 형식주의 비판운동의 표적이 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반(反) 스탈린 쿠데타 주모자로 지목된 군인 투하쳅스키와 교분까지 겹쳐 연방보안국에서 심문을 받는 신세가 됐다. 소설의 첫 장면은 젊은 쇼스타코비치의 불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밤중에 끌려가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아예 집 밖에서 밤을 지새웠다.


신문들은 이런 식의 기사를 썼다. "오늘 인민의 적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하는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평생을 '공포의 노예'로 살았다. 1937년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에 초연된 교향곡 5번 '혁명'을 비롯해 공산당 선전용 작품을 작곡했다. 그러면서도 주기적으로 당의 비판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1948년 일종의 자기비판이자 스탈린에 대한 헌정 성격의 성악곡 '숲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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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비에트 문화예술인 대표단으로 미국에 건너가 자신이 쓰지도 않은 연설문을 읽으며 체제를 선전해야 했다. 공산당 독재가 무너진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정치에 예술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을 법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쇼스타코비치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쉽게 알아채지 못할 소극적 저항을 작품 곳곳에 새긴 예술혼의 소유자로 바라본다.


교향곡 5번에 숨겨진 의미를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 표현은 또한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그의 교향곡에서 자기네가 듣고 싶은 것을 듣게 해주었다. 그들은 종결부의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를, 승리의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승리 그 자체만을, 소비에트 음악, 소비에트 음악학, 스탈린 체제의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을 향한 충성스러운 지지만을 들었다." (88쪽)


2011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가 2015년 발표한 작품이다. 시적 언어로 쓴 쇼스타코비치의 전기로도 읽힌다. 옮긴이 송은주씨는 "위대한 예술가의 내적 투쟁에 바치는 헌사"라고 썼다. 272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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