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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에는 역대급 '사이코패스' 살인마 왕자가 존재했다

임해군은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포악한 행실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간신'


[인사이트] 김천 기자 =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 446년 전 오늘인 1572년 9월 20일은 그가 선조의 장자로 태어난 날이다.


하지만 그는 서열상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분명 예법과 서열,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 시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도대체 그가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4월 14일자)에 남겨진 기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임해군은 어릴 적부터 성질이 거칠고 포악하며 학업을 게을리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간신'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기록에 확인되는 범죄만 하더라도 구타, 강도, 재산 강탈 등 두 손으로 세어 봐도 부족할 정도다.


임진왜란 때는 군사를 모으라는 명을 받고 찾아간 함경도에서 백성을 수없이 괴롭혀 왜군에게 포로로 넘겨지기도 했다. 


임해군은 평소에도 품행이 좋지 않았지만 이때 일로 인해 포악한 성격이 배가 됐다.


포로 협상 이후 자유의 몸이 된 임해군은 술과 여색을 탐했다. 또 살인이나 강간 등을 저지르던 예전의 모습도 되찾았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간신'


선조실록(선조 36년 3월 6일, 실록 160권)에서도 임해군에 대한 평은 온통 악평뿐이다. 기록에는 "악행이 많으니 무뢰배들과 종실의 망나니들이 그의 이름을 사칭해서 대신의 집을 습격, 강도질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고 적혀있다. 


그가 행한 행실 중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임해군은 1603년(선조 36년) 도승지 유희서의 첩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한다. 그리고 유희서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도승지는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장 혹은 부총리와 같은 직책이다. 유희서는 한음 이덕형의 외종 지간 친척이기도 했다.


이덕형은 이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매우 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간신'


이외에도 강간, 살인교사, 백성 수탈 등 포악함이 날로 심해지자 신하들은 임해군의 패악 무도함이 너무 지나치다고 왕에게 호소한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서자인 임해군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을까. 아버지 선조는 끝까지 임해군을 감싸 돌며 뚜렷한 처벌은 하지 않았다.


선조가 죽고 난 1년 뒤 임해군은 결국 동생 광해군에 의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된다.


이후 다시 강화군 교동으로 귀양 간 그는 그곳에서 사인을 알 수 없는 의문사를 당해 1609년(광해군 1년) 3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왕이 됐었다면 연산군보다 더한 폭군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받는 임해군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