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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 6인의 가슴 먹먹한 마지막 소원

일제의 모진 핍박 속에서도 나라를 향한 사랑만은 한결같았던 독립운동가 6명이 남긴 말을 소개한다.

인사이트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군 창설 기념 사진 / 국가보훈처


[인사이트] 김천 기자 = 몸이 부서지도록 두들겨 맞았다. 때로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기도 했다. 물고문은 일상이었다.


피부에는 멍이 들고 근육은 뭉개졌다. 뼈는 가루 났으며 손톱은 다 빠졌다.


일제의 비난과 조롱은 항상 존재했다. 그럼에도 조국을 향한 사랑만은 끊어낼 수 없었다.


일제 강점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오늘은 우리나라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말 여섯 가지를 소개한다.


1.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인사이트백범 김구 / 국가보훈처


평생을 오직 조국만을 위해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국군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을 받고 숨졌다. 


그는 독립 전이나 후나 한결같은 나라 사랑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는 세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2. 유관순 열사(1902~1920)


인사이트(좌) 유관순 열사 / 국가보훈처, (우)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 카드에 올라와 있는 유관순 열사 / 뉴스1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그는 1920년 9월 28일 꽃다운 열아홉 살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서대문형무소 감옥 안에서


3. 윤봉길 의사(1908~1932)


인사이트(좌) 윤봉길 의사, (우) 순국 직전의 모습 /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는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백 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4. 강우규 의사(1855~1920)


인사이트(좌) 강우규 의사 / 국가보훈처, (우) 서울역 광장에 있는 강우규 의사 동상 / 뉴스1


강우규 의사는 서울 남대문에 방문한 조선의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은거 중 친일파 김태석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5. 안중근 의사(1879~1910)


인사이트(좌)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우) 어머니가 보낸 수의를 입은 순국 5분 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 국가보훈처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됐다. 


그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여순(뤼순)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 의사의 최후 유언 중


6. 조마리아 여사(1862~1927)


인사이트(좌) 조마리아 여사 / 국가보훈처, (우)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힘썼다. 그는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후원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여사는 큰아들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사형을 앞둔 큰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