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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안창호 선생'의 순국 80주기입니다

청년 안창호의 머릿속에는 오직 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배다현 기자 = "이 한국 청년은 조국에서 교사가 돼 사람들을 깨우고 싶다고 한다"


1902년 미국의 한 일간지에는 당시 24살이었던 한국 청년, 안창호의 인터뷰가 소개됐다.


이 인터뷰에서 안창호는 "한국인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조국으로 돌아가 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기서 배운 모든 것을 가져갈 순 없겠지만 단 하나만이라도 핵심을 조국에 가져가고 싶다"고 밝혔다.


청년 안창호의 머릿속에는 오직 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는 교육 운동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인사이트연합뉴스


그는 미국에서도 교포들의 계몽을 위해 힘쓰면서 한인 민족 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다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료들과 함께 항일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국내로 돌아온 안창호는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대성 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을 벌였다.


또한 최남선, 김좌진 등과 함께 청년 학우회를 만든 뒤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제의 핍박이 더욱 강해지자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간 뒤 민족 운동 단체인 흥사단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3 · 1 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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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국내외 연락 조직인 연통제를 만들고,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그는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났던 날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는 오늘(10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서 안창호 선생 순국 80주기 추모식을 열 예정이다.


이날 추모식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학생,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다.


추모식 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에서 내부 전시실 리뉴얼 오픈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배다현 기자 dahyeon@insight.co.kr